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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자연의 아이

벽겸 2010. 2. 12. 15:24

우리 고향마을은 특별난 부자도 없고 특별히 가난한 집도 몇집 없는
고만고만한 평민들의 마을이었다.
대부분 집에 일소가 한 마리씩은 있었는데 몇 집만이 일소가 없었다.
다 고만고만해서 누가 못살고 잘사는지조차 구분할 줄 몰랐던 나는 나중에 커서야
일소가 없었던 집이 가난한 집이었다는 걸 알았다.
하나 둘 도시로 떠나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마을을 떠난 집들이
바로 일소가 없는 집들이었다.

마을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모두 소를 몰고 마을 한가운데 모이기 시작한다.
거의 다 모이면 일렬로 들을 향해 출발한다. 
학원도 방과후수업도 없던 시절이었고
숙제를 많이 내주면 어른들이 학교에 항의를 했을 뿐 아니라
바쁜 농번기에는 학교에서 알아서 일찍 마쳐주기까지 하던 시절이어서
아이들도 나름 중요한 일손이었다.
그 중 아이들에게 맡겨진 가장 큰 일이 소를 돌보는 일이었다.
여름에는 소를 몰고 들로, 산으로 가서 꼴을 먹였고 겨울이면 소죽을 끓여 공양을 했다.
한 여름 뙤약볕 아래 타박타박 걸어서 삼십여분 혹은 한 시간여 걸리는
들로,산으로 소를 몰고 갈 때는 정말 싫었다.
땀이 줄줄 흐르고, 목이 마르고, 걷기도 싫다.
그러나 일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우리들 세상이다.
소끈을 뿔에 칭칭 감아놓고 놀기 시작한다.
소들은 알아서 소들 끼리 풀을 뜯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이를 한다.
들판에 노을이 질 때쯤 집으로 돌아가는게 싫어질 정도로 흠뻑 놀이에 빠져있다.
어떨 때는 노는데 정신이 팔려 깜깜해서야 돌아가다가
마을 어른들의 집단 마중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 쯤 들판으로 가면 거의 소가 뜯어먹을 풀이 없다.
그러면 들판의 풀이 자랄 때까지 산으로 간다.
그렇게 산과 들을 누비며 다녔다.
그때도 나는 들판보다는 산이 좋았던 것 같다.
그나마 강이 있었지만 평평한 들판에 비하면
산은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반겼던가.
숨을 곳도 많았고 놀 곳도 많았다.  
비탈에서 미끄럼을 타기도 했고, 다람쥐처럼 나무타기도 했고, 칡넝쿨로 타잔놀이도 했다.
공동묘지의 무덤들은 우리의 훌륭한 놀이터가 되었다.

건망증이 심해지고 옛기억들이 흐릿해가는 속에서도 자연에서 놀았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내게는 산으로, 들로 소를 몰고 가서 놀았던 그 기억보다 더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그 때는 동네마다 이이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한동네 또래 친구만해도 십여명이 넘었다.
그런 기억으로 시골에 왔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처럼 놀 수가 없다.
동네에 아이들이 없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내려가지 않으면 친구를 만날 수도 없다.
달빛 훤한 밤이면 아이들 소리로 시끄러웠던 고향마을 골목길에도 이제 아이가 없다.
머리 허연 할머니들만 마을 회관에 모여앉아 화투를 치신다.

나는 지금도 가끔 꿈속에서 소를 몰고 그 산길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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