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가 내게로 왔네 (16)
나무야! 나무야!
달이 된 어머니 손가락이 남보다 다섯 개 모자라는 전씨는 추석 전 날 교회에 갔다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에서 아직 오지 않았고 십자가는 금빛 찬란했다. 이제 예수님의 친구도 뭣도 아닌 전씨는 조도가 낮은 의자에 앉아 두 손 마주 잡고 조금 전 보았던 아들의 문자를 떠올린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추석날까지 일을 해요. 내년에는 우리 다 같이 모일 수 있겠지요. 성준이는 이 시간까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중일까? 일용직 성호는 술집 구석에 처박혀 있을거고. 추석날에도 돌아올 둥지 한 칸 마련하지 못한 못난 아비를 욕해라 아들들아. 어깨가 떨리고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문득 이혼한 아내가 떠올랐다. 이혼 서류를 넘기고 전씨는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해물탕 집으로 가자고 했다...
선암사 갈잎 춤을 추는 늦은 오후 먼 풍경소리 더듬으며 나는 걷겠다 나무들 비탈에 서 있고 승선교 맞춤돌 지나간 발자국 하나 기다릴 때 계곡 물들은 한 번도 못 본 바다로 떠나겠다 늙은 은행나무 노랗게 잠이 들고 붉나무 붉게 울 때 스카프 자락 목을 조이고 구두 속 새끼발가락 숨이 막히겠다 좀작살나무 펄보랏빛 계곡가에서 눈 흘기고 산책나간 구름 산맥을 이루고 법고 소리 산사에 울릴 때 그는 서러운 늑대되어 떠나겠다 운판이 울어도 목어가 울어도 들을 수 없겠다 범종 소리 저 혼자 저녁놀을 불러도 물고기들 허공에서 춤을 춰도 하얀 차꽃 고개 숙이고 흐느껴도 지나간 발자국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바스락거리는 상수리 나뭇잎만 가슴에 쌓이겠다 딱새의 울음소리만 지치겠다 늦가을 오후에는 절대로 산사를 찾지 않으리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 2011년까지 조기 완공하겠습니다 건설회사의 야무진 다짐 앞에 산들이 허물어지고 도망갔다 남겨진 내장들이 두려움에 떨고있다 눈시린 공포가 늘 곁에서 협박한다 넓어지는 만큼 사라져가는 것들을 나는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갈 곳은 더 멀어지고 있지 않나 포크레인 소리에 떨고 있을 나무들, 풀들, 곤충들, 야생동물들, 그들을 피신시킬 공간이 더 이상 없다 우리는 조금씩 벌거숭이가 되고 있다
어떤 날 어느날, 문득 그의 연락처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 걸 알았다 내 번호보다 더 친근했던 숫자들이 가을이었고 흐린 오후였다 친구들은 제각기 패거리를 짓느라 갑론을박했고 나는 어디에도 낄곳이 없어서 홀연히 일어섰다 아무도 내가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잠시 내게서 지워져 가는 것들을 생각했다 스쳐지나가는 반대 방향 지하철을 보면서 나는 나이가 팔십쯤 먹은 노인네가 된 듯해서 오히려 편했다 더이상 애태울 일도 아둥바둥할 일도 없이 고요히 잠들고 싶었다 내 머릿속을 떠나간 숫자들처럼
갑자기 항아리가 폭발하는 듯한 낙뢰 소리에 놀라 깨어났더니 새벽 두시 반이었다. 계속되는 번개 소리에 지은 죄들을 생각하며 멍하게 앉아있었더니 시가 떠올랐다. 낙뢰가 마치 하늘이 주는 경고 같았다. 낙뢰 장난치지마! 성난 얼굴로 일갈을 던지는 한밤의 낙뢰 놀라 벌떡 일어나 지은 죄를 떠올려본다 하늘이 아파, 항아리가 깨질 듯 마른기침을 해 피눈물을 쏟고 있어 울고 있어 장난치지마! 아픈 하늘이, 성난 하늘이, 외친다 굉음처럼 독하게 터진다 쾅!
삼박사일 사찰순례하는 동안 두 편의 시를 썼습니다. 첫번째는 남원에 있는 실상사 극락전에서 썼고 두번째는 부석사 가는 길에 썼습니다. 실상사 극락전에서 겨울 세찬 바람도 고요해 지는 곳 여름은 어떨까 찾아왔더니 담장 밑 원추리 조용조용 인사하네 쉬어가라 하네 아미타부처님 보든말든 에라 모르겠다 한숨 자자 극락이 수미산 높은 곳에 있다 했던가 향내 밴 마룻장 드러누워 땀내 피며 자고 있는 내 꿈 속에 솔솔 풍겨오는 곰팡내 허방을 지키던 물고기 보글보글 달려와 호령하네 지극히 낮은 곳 거기 극락을 열어라 부처님인가 싶어 벌떡 일어났더니 우루루 몰려든 할매들 몸 기우뚱거리며 절하고 있네 머슥해진 나, 퍼석머리 가다듬고 움크리고 앉으니 절하는 할매들 엉덩이가 눈앞에서 파도친다 고개들어 부처님 얼굴보니 빙그레 웃..
가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휙 어떤 장면이 지나간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가 했더니 다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신기가 있나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너무나 일순간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대부분 의미없이 끝나고 만다. 어제는 부산에서 하동으로 오는 차안에서 잠을 자볼까 싶어 눈을 감았더니 역시나 휙 한 장면이 나타났다. 절룩절룩 힘없이 걷고있는 불쌍한 한 남자. 안데르센 동화에나 나옴직한 가여운 왕자. 스쳐지나간 왕자를 떠올리자 시가 내게로 왔다. 그 왕자, 바보 그 왕자, 홀로 산길을 걷네 바보인 왕자는 걸음걸이도 어정어정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 왕자의 칼은 무딘 나무 칼 왕자의 갑옷은 녹말로 지은 옷 신발도 없네 사냥을 못하는 그 왕자, 배가 고파 굶주림에 눈 멀었네 환한 보름달을 한 ..
시라는 걸 잘 모른다. 내겐 시가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시란 가까이 가고 싶어나 너무 먼 당신이었다. 하동 악양에 지리산학교가 생겼다. 이참에 내게 너무 먼 당신인 시를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이란 이해에서 시작한다고 믿고 더 잘 이해하고 즐기고 싶어 시문학반에 등록했다. 감히 시를 쓴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시문학반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참 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됐다. 시란 그렇게 먼 당신도 아니고 내 옆에 존재하는 사물들처럼, 일상처럼, 모든 것 속에, 언제나 숨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일기를 쓰듯 시를 쓸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시가 내게로 걸어왔다.(이게 네루다의 싯구절이었던가?) 난 시인이 아니니 잘썼다 못썼다 평가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