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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신경림 시인의 시는 마치 시의 고전같다. 마지막 시집(절대로 이 시집이 마지막 시집이 아닐거라고 믿지만 지금까지 나온 것 중 마지막 시집)인 [낙타]를 읽으면 세상을 오래 살고 이제 갈 날을 준비하는 자가 쓰는 시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마치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읽는 느낌이다. 낙타 신경림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
[의사 지바고]를 지금까지 읽지 않은 건 영화화 된 소설은 왠지 읽기 싫어서 였다. 그러다 어떤 소설가 지망생 중에 닥터 지바고를 읽고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는 말을 들었다. 그바람에 나도 언젠가 읽어봐야지 하고 벼루던 것을 이제야 읽게 된 거다. 난 너무나 차오르는 감동을 주최할 수 없어서 나에게 그 이야기를 했던 소설가지망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학작품을 읽고 이토록 감동하기는 참으로 오랫만이다. 요즘은 왠만해선 좀체 쉽게 감동을 잘 안하게 된지가 오래된 것 같다. 감성이 무뎌졌는지 요즘 나오는 책들이 쉽게 감동을 일으키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지바고는 작가의 분신이라해도 좋을 것이다. 그가 살아낸 삶은 내가 막연하게만 동경하던 혁명의 현장이 아니라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다...
달이 된 어머니 손가락이 남보다 다섯 개 모자라는 전씨는 추석 전 날 교회에 갔다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에서 아직 오지 않았고 십자가는 금빛 찬란했다. 이제 예수님의 친구도 뭣도 아닌 전씨는 조도가 낮은 의자에 앉아 두 손 마주 잡고 조금 전 보았던 아들의 문자를 떠올린다. 아버지 어디 계세요? 추석날까지 일을 해요. 내년에는 우리 다 같이 모일 수 있겠지요. 성준이는 이 시간까지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중일까? 일용직 성호는 술집 구석에 처박혀 있을거고. 추석날에도 돌아올 둥지 한 칸 마련하지 못한 못난 아비를 욕해라 아들들아. 어깨가 떨리고 짓씹은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문득 이혼한 아내가 떠올랐다. 이혼 서류를 넘기고 전씨는 아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했던 해물탕 집으로 가자고 했다...
소나무는 늘 가까이서 자주 보지만 마음과 달리 사진에 제대로 담아내기가 힘들었다. 어느날 솔숲에서 점심을 먹은 뒤, 자리를 깔고 잠시 누워서 쉬었다. 아, 거꾸로 보는 소나무의 모습은 서서 보던 모습과 달랐다. 바로 이거야. 드러누운채 카메라를 들고 이리저리 뒤척이며 찍었다.
큰 아이를 대안중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에 보내려고 하는데 제출해야할 서류가 많다. 그 중 하나가 [두려움과 배움은 함께 춤출 수 없다]를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다. 그 책은 몇 년 전에 우리집에 왔지만 그동안 책꽂이에서 가만히 잠자고 있다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미 그런 류의 책들을 제법 읽었기 때문에 내용이 새롭다기 보다는 나 자신을 다시금 성찰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도 다시 아이로 태어나서 아이와 함께 자라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이상 나는 자라는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게을리하기 시작했다. 먼저 자기성찰 시간이 점점 줄어들었다. 언제나 잠들기 전에 아이들을 앞에 혹은 옆에 끼고 들려주던 책읽기 시간도 어느 순간 사라졌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
선암사 갈잎 춤을 추는 늦은 오후 먼 풍경소리 더듬으며 나는 걷겠다 나무들 비탈에 서 있고 승선교 맞춤돌 지나간 발자국 하나 기다릴 때 계곡 물들은 한 번도 못 본 바다로 떠나겠다 늙은 은행나무 노랗게 잠이 들고 붉나무 붉게 울 때 스카프 자락 목을 조이고 구두 속 새끼발가락 숨이 막히겠다 좀작살나무 펄보랏빛 계곡가에서 눈 흘기고 산책나간 구름 산맥을 이루고 법고 소리 산사에 울릴 때 그는 서러운 늑대되어 떠나겠다 운판이 울어도 목어가 울어도 들을 수 없겠다 범종 소리 저 혼자 저녁놀을 불러도 물고기들 허공에서 춤을 춰도 하얀 차꽃 고개 숙이고 흐느껴도 지나간 발자국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다 바스락거리는 상수리 나뭇잎만 가슴에 쌓이겠다 딱새의 울음소리만 지치겠다 늦가을 오후에는 절대로 산사를 찾지 않으리
남해고속도로 확장공사 2011년까지 조기 완공하겠습니다 건설회사의 야무진 다짐 앞에 산들이 허물어지고 도망갔다 남겨진 내장들이 두려움에 떨고있다 눈시린 공포가 늘 곁에서 협박한다 넓어지는 만큼 사라져가는 것들을 나는 언제까지 기억할 수 있을까? 갈 곳은 더 멀어지고 있지 않나 포크레인 소리에 떨고 있을 나무들, 풀들, 곤충들, 야생동물들, 그들을 피신시킬 공간이 더 이상 없다 우리는 조금씩 벌거숭이가 되고 있다
어떤 날 어느날, 문득 그의 연락처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진 걸 알았다 내 번호보다 더 친근했던 숫자들이 가을이었고 흐린 오후였다 친구들은 제각기 패거리를 짓느라 갑론을박했고 나는 어디에도 낄곳이 없어서 홀연히 일어섰다 아무도 내가 사라지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나는 잠시 내게서 지워져 가는 것들을 생각했다 스쳐지나가는 반대 방향 지하철을 보면서 나는 나이가 팔십쯤 먹은 노인네가 된 듯해서 오히려 편했다 더이상 애태울 일도 아둥바둥할 일도 없이 고요히 잠들고 싶었다 내 머릿속을 떠나간 숫자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