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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이름이 그 사람을 바꿀 수도 있다. 나는 그 말을 믿는 편이다. 왜냐하면 내 이름에는 밝을 명자가 들어가는데 고모들의 말을 빌리자면 태어나면서부터 하도 울어대서 틀림없이 엄청난 성량의 가수가 될 거라 생각하면서 울지 말고 웃어라고 그렇게 지었단다. 그러나 타고난 성량에도 불구하고 박자치인 나는 노래에 영 자신이 없다. 게다가 성량마저 겨우 데모할 때나 사용했지 그다지 활용도 못하고 실제로 시끌벅적한 사람이지만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얘기하려고 너무나 노력한 나머지 차츰차츰 성량도 줄어들어 스무살 시절에 내가 일만팔천 군중 앞에서 마당극 속의 무당짓을 했다고 아무도 믿지 못한다. 어쨌든 밝을 명자가 내게 주었던 암시는 너무나 대단하여 나는 언제나 웃는 아이였다. 양 입가가 살짝 올라가도록 웃지않고 있었다면 나..
아마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거다. 주방칼 손잡이 뒤쪽 끝으로 마늘이나 생강을 찧을 수 있다는 사실을. 껍질을 벗겨놓은채 찧으려고 놔 둔 생강을 납작납작 썰어서 쿵쿵쿵쿵 찧고 있었다. 그러자 방에 있던 아들이 말했다. 엄마 일부러 그래 찧나? 그게 무슨 말이고? 엄마 찧는 소리에 리듬이 들어있다. 앗, 그러고 보니 쿵쿵쿵쿵 생강찧는 소리에도 나름 운율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생강을 찧는 것이 아니라 칼이라는 북채로 도마라는 북을 두드리는 악사가 되었다.
맑은 하루였다. 따사로운 가을볕을 등지고 앉으니 마음과 몸이 다 따뜻해졌다. 간단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데도 자꾸자꾸 미루다 마음만 바빠지는 듯해 오늘은 날잡은 모양으로 종일토록 하나하나 일을 처리해나갔다. 표고버섯 딴 것 말리고, 모과 납작납작 썰어 말리고, 건도라지 말리던 것 마저 햇볕에 내 놓고, 쑤세미 삶은 것 껍질 벗겨 말리고... 그러고 보니 해님에게 여러가지로 은혜를 받고 있다. 해님 감사! 그러는 틈틈 오랫만에 블로그에 들어와 시도 두 편 옮기고, 내가 즐겨찾는 싸이트 들어가 밀린 글도 읽고, 틀어놓은 들깨를 체에 쳐서 두 되 정도 깨끗하게 정리하고 저녁무렵에는 미루고 미루던 양파 모종도 심고, 절여서 씻어놨던 갓김치도 담고, 아, 정말 일 많이 했네. 게다가 이웃 택배부쳐주는 볼일도 봐주..
옹이지고 부박한 삶이 거북등 처럼 모여앉아 꺼칠꺼칠 춤을 추는 곳 하동 송림에서였지 어디선가 흐르는 두런두런 이야기소리 -당신 참 이상스럽소 이쪽으로 오지않고 왜 하필 강가쪽이요 굽은 등이 힘들지도 않소? -틀고틀어 낮추어야 보이지 -그래, 그리도 좋소? -당신도 들리지? 그녀가 부르는 낮은 노래 소리 환한 낮이면 갈롱대고 토라져도 석양녘이면 붉은 마음 숨기지 못해 어둠을 부르는 얄궂은 그녀 그녀 눈길 기다리며 세월을 낮추었소 -이백칠십여년을 보고도 그리 좋으시오? 굽은 그이 비틀어진 살결이 더욱 불그레지기 시작한다 초록 머리카락이 웃는다 -그녀는 늘 새로우니까 늘 곁에 서 있던 그녀, 늘 그랬듯 굽은 그이 등만 떨군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왜 자꾸 질문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삶은, 그대는 정답이 없는 시험지라 했던가? 꿈속에서 나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 종이를 들고 울고 있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늑골 나 몰라라 컵속에 있던 꺽지 껌뻑껌뻑 하품을 하며 지루해했다 어서 나를 마셔버려 물은, 꺽지는 내 몸에 섶간을 하듯 짜고도 짰다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것을 뱉기위해 목 깊숙이 손가락을 넣었다 너무 늦었다 꺽지는 배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내 살점을 뜯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충분히 늙었다
단 한 번 만난 인연의 아가씨인데 친구와 함께 우리집에 와서 사흘을 머물다 갔다. 그 친구들 또한 안 지는 이 년이 넘었지만 만난 건 이번을 포함해 세번째인 인연이었다. 얼굴만 알다시피한 인연이었지만 결코 어색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도반처럼 편안했다. 나는 그 사흘 동안 몹시 바빠 낮 시간은 내 볼일로 시간을 다 보내고 첫날 밤과 마지막 밤만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틀 밤동안 우리 셋은 살아온 전 과정과 상대방의 정신 세계까지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십대, 삼십대까지는 이런저런 인연을 일부러 혹은 억지로 만들고자 애써기도 했지만 요즘은 일부러 인연짓고자 애쓰지 않는다. 있는 인연 챙기기도 쉽지않은데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고 에너지를 낭비할 여력이 없음이다. 이제 인..
남편이 들깨 기름을 하루에 한숟가락씩 먹어대니 들깨농사를 아니지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 들깨는 거름을 안해도 무럭무럭 잘 자라고 약을 안해도 수확할 수 있다. 비록 잎은 벌레 때문에 생으로 먹기가 좀 그래도 들깨수확에는 큰 지장이 없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면 당연히 심을 때와 거둘 때를 알아야 하는 법인데, 남들 다 심고나면 그제야 부랴부랴 심고 남들 다 수확을 끝내고야 이제 수확한다고 뒤늦게 바쁘니, 나도 내 자신이 한심스러울 때가 많다. 실컷 심으면 뭐해 수확시기를 놓치면 심느라고 고생한 것만 억울하지. 들깨를 지난주나 지지난주에 벴어야 됐나보다. 반은 익어서 씨앗이 저절로 떨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한심해라. 속으로 혀를 차며 오늘 거의 종일토록 들깨를 벴다. 바닥에는 이미 들깨가 반쯤은 쏟아져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