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생활의 발견 (17)
나무야! 나무야!
어제는 친한 언니로부터 선물받은 박노해의 세번째 시집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읽었다. 사실 선물 받은 건 작년 11월인데 왠지 손이 가지 않았다. 손이 가지 않은 이유는 복잡한 심리 표현인 셈이다. 여러 이유 중 혹시 실망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숨어있었다. 그런데 역시 박노해는 박노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누워 있는 남편 옆에서 낭독하며 읽었는데 자주 자주 눈물을 글썽이다 나중에는 아주 펑펑 울어버리기도 했다. 구체적이고 섬세하면서도 사물과 세상의 숨은 이면을 통찰하고 따뜻한 가슴으로 그려내는 그의 시는 갈수록 예민하고 깊어진다. 대개의 80년대 시가 이제는 거의 읽혀지지 않는데 박노해의 글은 여전히 생생하게 와닿는다. 그래도 난 박노해의 펜이 되기를 꺼렸다. 두번째 시집 [참된 시작]을..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리는 눈을 보며 찻물을 끊였다.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꼼짝을 못하고 갇혀있어야 한다. 고요하고 적막하고 호젓한 연말이다. 좋다.
아들이 있는 실상사 작은학교에 학부모 당번 때문에 와 있다. 지난 주 토요일에 들어와서 이번주 토요일에 나간다. 학부모 당번이 하는 일은 아침 여섯시에 식사당번을 맡은 학생들을 깨워서 식사 준비를 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일곱시 반까지 나머지 학생들을 깨워 같이 산책을 가든지 운동을 하든지 요일에 따라 정해진 아침 운동을 한다. 아침 공양 뒤에는 뒷설거지까지 아이들이 깨끗이 하도록 시킨다. 그런 뒤에는 아이들의 수업을 참관할 수도 있고 이런 저런 소일거리가 있으면 맡아서 한다. 아침식사는 아이들이 하고,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는 공양간 선생님이 하지만 뒷설거지는 식사당번 아이들이 한다. 저녁 식사 전에는 간식이 있는데 간식은 생협 과자, 떡, 빵, 과일 등이다. 빵이나 쿠키는 제과제빵 동아리 아이들이 ..
만화 '식객'에 보니 애인이나 마누라한테도 비밀로 하고 먹는 음식이 있었다. 바로 옻순이다. 두릅순, 음나무순, 참죽순, 죽순 다 먹어보았지만 옻순을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몹시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맛이기에 애인한테도 숨기나. 그 이야기를 같이 차작업하는 스님에게 했더니 스님집에 있다면서 순을 따주는 게 아닌가? 애인도 마누라도 아닌데 이렇게 고마울수가! 혹시 옻이 오를까 약간의 주저함은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귀한 것을 아니 먹을 수가 있나. 스님 말에 의하면 초장이 아니라 고추장에 들기름을 친 장을 만들어 찍어먹어라는 거였다. 그걸 들기름고추장이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참 고소하고 맛있었다. 옻순의 맛에 대해 말하자면 글쎄, 맛있긴 했지만 즉시 데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점심시간에 먹어라 해서 먼저..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오지 않아 밖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집 뒤쪽에 있는 녹차밭에서 녹차를 따시던 할머니 한 분이 큰 소리로 말했다. "호랭이 온다 퍼떡 가자" 녹차를 따는 사람에게도 만드는 사람에게도 비는 호랑이가 맞다. 비가 오면 녹차 일은 땡이다. 야생화 농원에 가서 꽃을 몇 가지 샀다. 노루귀, 섬노루귀, 하늘매발톱, 패랭이, 노루말발, 파라솔, 꽃양귀비... 꽃밭에 풀을 뽑고 사온 꽃을 심었다. 같은 초본인데 어떤 것은 뽑혀나가고 어떤 것은 돈을 주고 사와서 심는다. 그러는 내가 우습다.
작년 같으면 지금쯤 차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을 시기인데 아직 차작업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날씨가 차서 찻잎이 늦어도 한참 늦된다. 오늘은 오전 내내 풀을 뽑았다. 하늘이 내가 뒷밭을 다 맬 동안 기다려준 것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비가 오니 아랫집 언니가 불러서 오랫만에 아랫집으로 나들이를 갔다. 언제나처럼 우리의 화제는 기후변화에 따른 걱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랫집 언니는 작년에 있었던 대만의 태풍 피해 사례를 들먹이며 올해 우리나라에 예정돼 있는 심각한 태풍예보를 얘기했다. 안그래도 심상찮은 기온의 변화에 민감해져 있던 나는 오싹 두려움을 느꼈다. 농사란 사람과 하늘이 함께 하는 일이라 자연의 변화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곳곳에 재앙을 부르는 짓들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으니 오호통재라!
매화 향기를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달콤한, 달큰한, 은은한, 알싸한,달짝지근한, 나른한, 벌꿀냄새, 이렇게 표현력이 부족하다. 마당을 나갈 때마다 코를 자극하는 매화향에 잠시 잠시 쉼호흡을 하긴 했지만 충분히 즐길 시간도 없이 바쁘게 왔다갔다 하는새 벌써 매화가 지고 있다. 오늘 문득 바닥에 떨어진 매화 꽃잎을 보았다. 아, 매화가 지고있네. 갑자기 서글퍼졌다. 어쩌자고 매화나무에 둘러쌓여 살면서 매화향기에 깊이 한 번 취해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봄날을 보낸단 말인가! 물론 봄날 다운 봄날은 며칠 되지 않았다. 봄 장마라 불러도 좋을 만큼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렸고 온 천지를 뒤덮는 황사에 밖에 나가기도 싫은 날이 며칠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닌데... 만물의 신들을 너무 경솔히 대한 나를 돌아본다.
드디어 우리 아들이 실상사 작은학교에 들어갔다.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아들에게 작은학교 살이가 만만한게 아니라고 이야기 해준다. 자기 양말하고 팬티는 스스로 손빨래를 해야하고, 당번이 되면 아침 밥도 해야되는거 알지? 그런 거 잘해. 속으론 언제 잘했나, 되묻지만 넘어가고 또 묻는다. 일주일에 삼일은 농사 짓는 시간이 있는 것도 알제? 나 농사일도 잘하잖아. 겨우 풀 뽑는 것 정도 해놓고 과장이 심하지만 긍정적인 게 부정적인 것보다 낫지 하고 넘어간다. 엄마 안 보고 싶겠나? 엄마는 괜찮은데 고양이가 보고 싶어서 걱정이다. 엄마한테 좀 심한 거 아이가? 엄마는 내 없어도 잘 살건데 뭐. 아들 하나만 없는데 집안이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 물론 우리 아들이 심하게 시끄러운 부류이긴 하지만. 어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