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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직근(直根)의 이유 어린 차나무 밭을 매다 풀과 함께 뽑힌 나무를 보았다 차나무의 뿌리가 지상의 얼굴보다 두세 배가 넘는 걸 그 때 확인했다 차의 향기는 그 긴 뿌리에서 나는 것 땅속 깊이 치달은 아픔이 향으로 피어나는 것 지상의 것들이 말라가는 계절에도 초록으로 눈부신 건 저 바닥 깊이 숨은 물줄기를 찾아 어둠을 뚫어가기 때문이리라 근원을 향한 날선 각오가 있어 차나무는 언제나 청춘이다 지나가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내 영혼 홀짝 홀짝 차를 마시다 남은 찻잎까지 꼭꼭 씹는다
한때 나는 푸른 강에 있었다 참 이상하다 버들강아지 아직 저렇게 탐스럽다니 앙상한 가지들 그대로 영영 눈감을 줄 알았는데 발갛게 물이 오르고 마른 풀들 사이 연두빛 싹들이 고개 내미네 그러나 멀지 않았어 버들강아지 흰솜털 날리기 전에, 물오른 가지들 이파리 제 모습 다하기 전에, 저 풀들 꽃피어 열매 맺기도 전에, 뿌리째 뽑혀 어디론가 실려가다 생사조차 까마득해지겠지 지나가는 물의 이야기를 모래알 하나, 전해 듣는다 왜라고 물을 시간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기계음에 바닥이 흔들린다 모래알갱이들 미친 바람마냥 흩어진다 더러 물 따라 흘러가고 더러 회오리를 일으키며 정신을 잃고 더러 놀람과 분노에 부르르 치를 떤다 동동거린다. 도와주는 손길 하나 없다 모래알 하나, 덜커덩 기계 손에 휩쓸리며 저 깊은..
회화나무 그늘 꿈에, 할매가 고향 집 앞 나무를 베어버린 거야 그 나무, 잘 있을까? 걱정이 돼서 죽겠어 너거 할매가 그걸 얼매나 좋아했는데 말도 안 되는 꿈이다 전화선 너머 엄마는 내가 몰랐던 얘기를 들려준다 절대 고향 따윈 그리워지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어느새 남의 집이 된 고향집 앞 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말간 아침 해를 걸고 나를 깨우던 수백 년 묵은 회화나무 작은 오남매가 모두 팔을 벌려도 에워쌀 수 없었던 나무 그 그늘 아래서 우리는 자랐다 열 살 누이의 등으로는 성에 안차 울어대던 막내의 콧물이 뒷목을 적실 때쯤 울지마, 울지마 엉덩이를 꼬집다 못해 뿔을 박는 소처럼 동생의 머리를 나무둥치에다 박고는 같이 울어대던 아이 나락 타작하던 날이면 맑은 하늘이 싫어 비를 기원했던 청개구리 떫은 감..
비둘기 두 마리 소주를 마시네 검은 비닐 봉다리 속 찌꺼기를 안주 삼아 소복소복 눈은 쌓여가고 바쁜 걸음들 비틀비틀 지나는데 KTX 바람처럼 떠나는 서울역 앞 소주잔 속 시간은 더디기만 하네 비둘기 두 마리 소주를 마시네 남은 한 잔으로 오종종 가까이 있는 참새도 부르네 소복소복 눈은 쌓여가고 지친 구두들 저벅저벅 지나는데 셔터문이 하나 하나 내려지는 시간 소주로 데운 배가 수상해 서로의 깃털을 껴안고 머리깃을 부비네 날이 밝기까지는 햇살을 되찾기 까지는 아직은 서로운 비둘기
덜 깬 잠을 부비며 천자루 하나 들고 뒷산 꿀밤나무 밑으로 갔지 동갑내기 분숙이 부수수한 머리로 나타나면 잠이 확 달아나 버리고 날랜 손이 되어 동글동글 꿀밤을 줍지 게으른 다람쥐 그제야 우리와 날경쟁이지 밤새 떨어진 꿀밤은 순식간에 바닥나고 잠시 엉덩이를 붙이고 재잘거리면서도 내 귀는 꿀밤 잎사귀 톡 아침 공기를 가르며 꿀밤 떨어지는 소리 꿀밤나무 비탈 아래는 대나무숲 꿀밤은 자꾸 그쪽으로 숨어 떨어지지 다람쥐보다 작은 우리 손 그곳이 어디든 잠깐이면 찾아내지 나는 싫어라 했던 겨울밤 묵 한 판을 위해 가을 아침이면 꿀밤나무 아래로 내몰렸던 나 마흔이 넘어서야 겨울밤 묵 한 그릇의 참맛을 알았네 톡 서늘한 가을 아침, 내 맘의 대문 두드리는 소리 다람쥐야 어서 와 그 땐 내가 미웠지?
두 마리 고양이 우리집에는 검은색과 갈색 무늬가 섞인 고양이 한 마리 있지 고양이를 집에 데려온 날에야 마당 앞을 휙 지나는 갈색 얼룩의 도둑고양이를 봤지 저 놈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영이네 고양이 나비의 일대 딸 나래는 병민이 집에 가고, 이대 딸 나야는 우리집에 왔지 '나야'는 집 고양이 도둑고양이는 '너야' 나와 너 사이 집 안과 밖의 차이 사료와 음식물찌꺼기의 차이 보호와 경계의 차이 '너야'는 집 주인의 눈 속을 본 다음날부터 대담해지기 시작했지 그래도 결코 집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지 너는 '너야' '나야'는 집고양이 '너야'는 도둑고양이 '나야' '너야'
옹이지고 부박한 삶이 거북등 처럼 모여앉아 꺼칠꺼칠 춤을 추는 곳 하동 송림에서였지 어디선가 흐르는 두런두런 이야기소리 -당신 참 이상스럽소 이쪽으로 오지않고 왜 하필 강가쪽이요 굽은 등이 힘들지도 않소? -틀고틀어 낮추어야 보이지 -그래, 그리도 좋소? -당신도 들리지? 그녀가 부르는 낮은 노래 소리 환한 낮이면 갈롱대고 토라져도 석양녘이면 붉은 마음 숨기지 못해 어둠을 부르는 얄궂은 그녀 그녀 눈길 기다리며 세월을 낮추었소 -이백칠십여년을 보고도 그리 좋으시오? 굽은 그이 비틀어진 살결이 더욱 불그레지기 시작한다 초록 머리카락이 웃는다 -그녀는 늘 새로우니까 늘 곁에 서 있던 그녀, 늘 그랬듯 굽은 그이 등만 떨군다
모든 것이 끝난 뒤에야 왜 자꾸 질문이 생기는지 모르겠다 삶은, 그대는 정답이 없는 시험지라 했던가? 꿈속에서 나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 종이를 들고 울고 있었다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늑골 나 몰라라 컵속에 있던 꺽지 껌뻑껌뻑 하품을 하며 지루해했다 어서 나를 마셔버려 물은, 꺽지는 내 몸에 섶간을 하듯 짜고도 짰다 식도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것을 뱉기위해 목 깊숙이 손가락을 넣었다 너무 늦었다 꺽지는 배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내 살점을 뜯기 시작했다 이미 나는 충분히 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