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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네

한때 나는 푸른 강에 있었다

벽겸 2010. 4. 1. 11:09

한때 나는 푸른 강에 있었다



참 이상하다

버들강아지 아직 저렇게 탐스럽다니

앙상한 가지들 그대로 영영 눈감을 줄 알았는데

발갛게 물이 오르고

마른 풀들 사이 연두빛 싹들이 고개 내미네

그러나 멀지 않았어

버들강아지 흰솜털 날리기 전에,

물오른 가지들 이파리 제 모습 다하기 전에,

저 풀들 꽃피어 열매 맺기도 전에,

뿌리째 뽑혀 어디론가 실려가다

생사조차 까마득해지겠지


지나가는 물의 이야기를 모래알 하나, 전해 듣는다

왜라고 물을 시간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는 거대한 기계음에 바닥이 흔들린다

모래알갱이들 미친 바람마냥 흩어진다

더러 물 따라 흘러가고 더러

회오리를 일으키며 정신을 잃고 더러

놀람과 분노에 부르르 치를 떤다

동동거린다.

도와주는 손길 하나 없다

모래알 하나, 덜커덩 기계 손에 휩쓸리며

저 깊은 물속 지층의 진흙덩이가 소리치는 걸 듣는다

누구냐

어떤 몹쓸 것들이 수억만 년 다져온 우리 삶터를 부수느냐

이렇게 허망하게 무너지다니

켜켜이 쌓아둔 서러운 세월들

어디에다 하소연할까


모래알 하나, 이제는 햇볕에 바짝 마른 채

어딘가로 실려가며 지난 날을 떠올린다

깊은 산의 바위였던 수 억만 년 전

구르고 구르고 굴렀던 수없이 많은 시간들

한 때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던 물살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나치는 강변의 화사한 봄꽃들에 마음을 빼앗기기도 했지

그러다 자신도 씨앗 하나 움틔우고 싶다는

덧없는 욕망에 시달리기도 했다

기름종개며 은어며 갈겨니며 모래무지가

제 몸을 더듬던 낯 뜨거운 시간도 많았지

먼 바다에서 돌아온 연어가 모래웅덩이를 파서 알을 낳고

다시 모래를 덮고 죽어가던

마지막 모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지

그 알들을 키우며 모래알 하나, 얼마나 가슴 두근거렸던가

이윽고 부화한 치어들이 바다로 떠나갈 때

제 자식을 보내는 듯 온몸이 갈라졌지

물억새들 서걱서걱 함께 울고

달뿌리풀의 뿌리가 위로하러 달려오고 있었지


모래알 하나, 이제 시멘트에 뒤섞이며 재채기를 해댄다

물의 기억, 바람의 기억은 새록새록 어제일 같은데

벌써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 아수라장에 남생이와 느림보 옴두꺼비는 다치지 않았을까

갈대숲에 숨어살던 개개비들은 이제 어디 가서 살까

쇠백로는 굶주리고 있지 않을까

절규하던 진흙덩이 속에 켜켜이 쌓인 한스런 세월들이

원한되어 강물을 떠돌지 않을까

한 때는 겨울마다 찾아오던 물오리들의 발길질에

이리저리 채이며 원망도 했지만

그 발길질조차 그리울 줄이야


언젠가 바다에 닿을 날을 꿈꾸며 살았던

강물 속 모래알 하나, 왜 그렇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철 구조물 속에 시멘트와 엉겨서 던져 진다

다시 한 번만 그 강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제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으리라

잔소리를 해대던 강물,

물속에서 춤을 추던 검정말

강둑의 버드나무와 쑥부쟁이,

왜가리의 날갯짓

쉬리의 눈부신 줄무늬

멀고 먼 여행을 막 끝낸 장어의 멋진 몸뚱아리

수달의 날쌘 헤엄

무엇보다 잊지 못할 은빛물결의 기억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콘크리트 속에서

모래알 하나, 울컥울컥 절망을 짓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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