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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내게로 왔네

회화나무 그늘

벽겸 2010. 3. 5. 16:40

회화나무 그늘

꿈에, 할매가 고향 집 앞 나무를

베어버린 거야

그 나무, 잘 있을까?

걱정이 돼서 죽겠어

너거 할매가 그걸 얼매나 좋아했는데

말도 안 되는 꿈이다

전화선 너머 엄마는 내가 몰랐던

얘기를 들려준다


절대 고향 따윈 그리워지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어느새 남의 집이 된 고향집 앞

나무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말간 아침 해를 걸고 나를 깨우던

수백 년 묵은 회화나무

작은 오남매가 모두 팔을 벌려도

에워쌀 수 없었던 나무

그 그늘 아래서 우리는 자랐다


열 살 누이의 등으로는 성에 안차 울어대던

막내의 콧물이 뒷목을 적실 때쯤

울지마, 울지마 엉덩이를 꼬집다 못해

뿔을 박는 소처럼 동생의 머리를

나무둥치에다 박고는 같이 울어대던 아이

나락 타작하던 날이면 맑은 하늘이 싫어

비를 기원했던 청개구리

떫은 감 하나 따 물고는 소를 몰고

타박타박 꼴먹이러 집을 나서던 아이

밤마다 동네 아이들을 불러내느라

어둔 골목을 누볐던 반딧불이

마당을 반 넘게 덮던 회화나무 그늘을

오가며 자랐던 아이는

도회지로 유학 떠나던 열다섯 살부터

나무도 잊었다


경운기를 몰고 대문 안을 들어서던 젊었던

아버지의 새마을 모자 위로 스치던 잎사귀

아픈 할배는 순하게 잠이 들어

나비 한 마리로 팔랑거릴 때

할매의 정화수 위로 꽃잎이 지고

자식을 먼저 보낸 증조할매는

긴 곰팡대를 물고 살아

녹슨 가래통이 정물처럼 늘 곁을 지켰지

목숨줄이 쇠탯줄보다 길다 탄식하며

외동 손자마저 죽을 병 걸린 걸 알았을 땐

스스로 곡기를 끊었지

스물아홉 살 먹은 신랑을 잃고

서른 살 청상과부로

늙었던 고목은 그렇게 갔어

주인을 잃은 경운기를 헐값에 넘긴 할매는

모두가 잠든 밤,

회화나무 아래서 울었지

자식을 앞세운 어미는 남 앞에서

눈물조차 보일 수 없다고

마흔하나에 다섯 자식을 떠안은

엄마는 깨진 항아리 였어


난 마흔을 넘기는 게 두려웠어

증조할매나,

할매나,

엄마 같은 운명이 되고 싶진 않았어.

그러나 어느새 다행스런 마흔셋,

일소의 쟁기질처럼 그 때의 엄마 나이를 넘긴 거야

회화나무 그늘을 떠나지 않았던 할매는 갔지만

남편도 잃지 않았고, 아이들도 건강하지

그런데 아직도 자주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울고 있는 꿈을 꿔

이제는 남의 집이 돼버린

옛집에서 울고 있어


악양길을 넓힌다고 잘려지는 나무들을 보며

비로소 옛집 회화나무를 떠올린 거야

열다섯 살에 떠나온 그 나무를

그제야 알게 된 거야

그 나무가,

자신의 그늘 아래서 자랐던 아이들을

많이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고

내 안부도 궁금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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