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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가끔 잠을 자려고 눈을 감으면 휙 어떤 장면이 지나간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그런가 했더니 다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다. 신기가 있나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너무나 일순간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대부분 의미없이 끝나고 만다. 어제는 부산에서 하동으로 오는 차안에서 잠을 자볼까 싶어 눈을 감았더니 역시나 휙 한 장면이 나타났다. 절룩절룩 힘없이 걷고있는 불쌍한 한 남자. 안데르센 동화에나 나옴직한 가여운 왕자. 스쳐지나간 왕자를 떠올리자 시가 내게로 왔다. 그 왕자, 바보 그 왕자, 홀로 산길을 걷네 바보인 왕자는 걸음걸이도 어정어정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 왕자의 칼은 무딘 나무 칼 왕자의 갑옷은 녹말로 지은 옷 신발도 없네 사냥을 못하는 그 왕자, 배가 고파 굶주림에 눈 멀었네 환한 보름달을 한 ..
며칠 집을 비웠더니 멧돼지가 옥수수밭을 엉망으로 만들어놨다. 우리집이 이사오기 전까지 멧돼지가 고구마밭을 엉망으로 만들어서 속상했다는 뒷밭 할아버지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 정작 경험하기는 처음이다. 개들이 사라지고 사람도 없는 집을 어찌 그리 잘 알고 찾아왔는지. 옥수수를 분질러 줄기도 옥수수도 모두 갉아먹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옆에 있는 토마토나 고추, 대파, 피마자는 멀쩡하다. 멧돼지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꼭 집어서 먹었나보다. 그나마 고맙다. 나는 갑자기 배고픈 멧돼지가 불쌍해져서 보고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이 훼손한 먹이사슬 때문에 괜히 멧돼지만 애꿋은 말썽쟁이취급 받고 있으니, 우리집에서 난 맛있는 옥수수를 못먹게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시라는 걸 잘 모른다. 내겐 시가 어렵고 두렵게만 느껴졌다. 시란 가까이 가고 싶어나 너무 먼 당신이었다. 하동 악양에 지리산학교가 생겼다. 이참에 내게 너무 먼 당신인 시를 사랑하고 싶었다. 사랑이란 이해에서 시작한다고 믿고 더 잘 이해하고 즐기고 싶어 시문학반에 등록했다. 감히 시를 쓴다는 건 생각도 못했다. 그런데 시문학반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참 시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걸 느끼게 됐다. 시란 그렇게 먼 당신도 아니고 내 옆에 존재하는 사물들처럼, 일상처럼, 모든 것 속에, 언제나 숨어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나도 일기를 쓰듯 시를 쓸 수 있겠군.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로 시가 내게로 걸어왔다.(이게 네루다의 싯구절이었던가?) 난 시인이 아니니 잘썼다 못썼다 평가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자주 가서 친근한 실상사에서부터 사찰 순례를 시작했다. 실상사 가는 길에 연밭이 있다. 연꽃은 필듯말듯할 때가 제일 좋더라. 연잎들이 층을 이루고 있었다. 못생긴 것 예쁜 것, 키가 큰 것, 작은것, 뚱뚱한 것, 날씬한 것, 다양해야 세상이 더 아름답다는 걸 연잎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꽃을 떨군 연밥(?)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조용조용 뭔가를 말하는 듯했다. 오래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야 들릴 얘기를. 맺힌 물방울이 꼭 눈물 같다. 실상사 입구 연못가에 상사화가 피었다. 몇 년 전, 이 상사화를 처음 본 날이 기억난다. 참으로 처연해 보였다. 나는 저 입구에서 늘 망설인다. 오래전 떠나간 친구의 뒷모습 같이 왠지 짠해진다. 한참 동안 서서 두리번거리다 돌아섰다. 실상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